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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먼 자들의 도시, 백색 어둠

by 아일야블로그 2024. 6.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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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눈앞이 새하얗게 변했다.

어느 날 갑자기 눈앞이 새하얗게 변했습니다. 눈앞을 하얀 빛이 가리고 있는 것처럼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게 되었고 순식간에 세상은 순백의 어둠에 갇히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여기 유일하게 세상을 제대로 볼 수 있는 사람, 안과 의사의 아내가 있습니다. 안과의사인 그녀의 남편 조차 눈이 멀어버렸습니다. 이 정체를 알 수 없는 병 때문에 정부당국은 이 병이 전염병이 아닌지 의심합니다. 그리고 관련 병을 앓는 사람을 한곳에 모아 통제하기로 합니다. 의사의 아내는 사랑하는 남편을 위해 세상이 훤하게 보이는데도 눈이 보이지 않는 척을 하며 수용소에 들어갑니다. 수용소 안에서 의사의 아내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납니다. 그들은 눈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눈으로 판단할 수 있는 정보 모든 것을 상실 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옷차림으로 부유한지 가난한지를 알아 볼 수도 없고, 피부색으로 인종을 알아볼 수도 없습니다. 그들은 서로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제대로 씻을 필요도 없었고, 아무데서나 옷을 벗고 다녀도 스스로 수치를 알 수 없었습니다. 어느덧 수용시설 안은 나름의 힘의 불균형이 생깁니다. 그리고 3번방의 사람들은 총과 무기로 무장하고, 식량을 독점해버립니다. 그들은 살고 싶으면 자신들에게 여자를 보내 성상납을 하라고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식량을 주지 않겠다고 합니다. 여자들은 방에 있는 자신과 상관없는 남자들까지 같이 살리기 위해 몸을 팝니다. 그러다가 폭행을 당해 죽기도 하고, 많은 이들이 다치기도 합니다. 의사는 자신의 아내도 다른 남자에게 몸을 팔게 되는 것에 충격을 받습니다. 하지만 그도 먹고 살아야하기 때문에, 방에 있는 모두를 위해서 그녀를 말리지 못합니다. 그래서일까요, 의사는 같이 어울려 대화를 하던 윤락 여성과 아내 몰래 관계를 가집니다. 의사의 아내는 상처를 받지만 상처에 매몰돼 있지 않고, 지금 해야 할 일을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시설 내부에서 반란이 일어나 3번방이 불타게 되고, 시설에 갇혀있던 사람들은 시설 밖으로 나옵니다. 그런데 자신들을 지키던 군인들이 사라진 것을 알게 됩니다. 그제야 그들 모두는 자유가 됩니다. 앞이 보이지 않는 무리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의사의 아내와 함께 하는 무리는 의사 아내의 안내를 따라 의사의 집으로 갑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곳에서 다시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회복하는 시간을 갖습니다. 더러움을 씻어내고, 포근한 잠자리와 분리된 생활공간도 갖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일상의 소중함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작품 내에서 가장 먼저 눈이 멀었던 남자가 커피를 마시려 하자, 그의 눈 앞에 커피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렇습니다. 그렇게 서서히 모두가 눈을 뜨는 것을 암시하고 영화는 끝이 납니다.

 

우리는 무엇에 눈이 멀어 사는가.

<눈먼 자들의 도시>는 주제 사라마구가 쓴 장편 소설 <Ensaio sobre a cegueira>을 원작으로 한 영화입니다. 본 소설을 쓴 후 <눈 뜬 자들의 도시>라는 후속작도 출간했다고 하니, 소설에 관심이 있으신 분이라면 참고하시면 좋겠습니다. 소설 <눈먼 자들의 도시>가 문학으로서 많은 호평을 받은 관계로 영화는 많은 압박 속에서 개봉되었습니다. 그리고 영화 제작에 일본의 자본이 투자되어 영화에는 일본인 부부 캐릭터도 등장합니다. 소설의 주제는 해치지 않는 쪽에서 각색이 진행 되었다고 합니다. 영화에서는 각자의 이유로 뜬 눈을 하고도 눈이 먼 것처럼 사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분명 그들의 눈은 세상을 보고, 사물을 분간하지만 그들은 엄밀히 말하면 장님과 같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사랑하는 사람을 보지 않고, 이야기 하는 사람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도 않고 이야기를 합니다. 항상 목표에 눈이 멀어 있는데, 그것이 돈인지, 아니면 욕구인지 알 수도 없는 지경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모두 눈이 멀었을 때도 그들은 더 이상 볼 수 없게 된 소중한 것들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원래 눈이 멀어 살았던 것처럼 역시 눈먼 채로 삽니다. 특히 수용소의 생활을 단편적으로 본다면, 그들은 눈이 멀었다는 이유로, 사람들이 보지 못한다는 이유로, 자신의 욕구를 분출시키고, 타인을 억압합니다. 그 곳에서 보였던 무질서한 그 모습, 그것들은 분명 그들이 원래부터 눈멀어 살던 것들이 그대로 표현 된 것이라 생각합니다. 돈에, 성에, 권력에, 욕망에. 그래서 영화에서 눈먼 사람들은 백색 빛에 눈이 멀어 있는 상태로 표현됩니다. 진짜 물리적 눈이 멀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 할 수 있습니다. 지금 현재 우리 역시 인간성을 상실한 백색 어둠에 갇혀있는 게 아닌지 생각해 봄직한 영화였습니다.

 

인간의 존엄이란

수용소에서의 생활은 인간의 존엄성이라고는 찾을 수 없는 상실의 시대 그 자체였습니다. 식사를 위해 여자를 파는 남자들, 그들은 수치를 알지만 여성들을 위해 굶어 죽겠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들은 아무데나 분변을 해결하고, 아무데서나 성관계를 합니다. 영화를 보는 내내 불편했던 것, 그것은 동물과 구별 되는 인간 그 자체로의 존엄이 상실된 모습을 봤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까지 바닥으로 떨어진 그들이 진정한 자유를 되찾고, 억압에서 벗어나 각자의 길을 갔을 때, 영화를 보는 저도 해방감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의사 부인의 배려로 의사 부부의 집에서 생활하는 모습을 보고, 이제 겨우 인간적인 모습으로 돌아왔다는 인상을 얻었습니다. 그들은 그 어떤 목표에도 눈멀지 않고, 눈앞에 있는 커피 향에, 눈앞에 있는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우리며 시력을 찾아갑니다. 사실 영화에서 말하는 인간적인 모습은 거창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눈을 갖고 봐야 할 것들은 정말 간단한 것들 자체였습니다. 나를 사랑하고, 시선을 주는 사람에게 눈을 맞추고, 함께 하는 순간을 소중히 여기는 것, 그것만으로도 모두 다시 시력을 되찾았으니까요.

 

의사의 아내는 왜 눈멀지 않았을까?

애초에 그녀는 시선을 맞추고 대화하며, 함께 하는 사람을 사랑하고 아끼는 사람이었습니다. 가까이 있는 사람과 보내는 시간에 충실했고, 상대를 배려했으며, 마음 따뜻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 그녀는 백색 암흑에 갇히지 않았습니다. 그럴 필요가 없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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