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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의 라스트 세션, 실존 인물로 상상한 영화

by 아일야블로그 2024. 9.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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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스포일러가 한가득 있습니다. 연람에 주의 바랍니다.>

 

프로이트가 사망하기 20일 전 그를 찾아간 옥스퍼드의 교수는 누구?

1939년 9월 3일 런던. 프로이트의 집에 옥스퍼드의 한 교수가 찾아왔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교수가 누구인지는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궁금합니다. 죽음이 목전에 찾아온 프로이트와 독대를 한 옥스퍼드 교수는 누구일지.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그가 누구인지 추측했습니다. 그 결과가 <프로이트의 라스트 세션>인 것입니다. <프로이트의 라스트 세션>은 아이맨드 M 니콜라이의 저서 ‘루이스 VS. 프로이트’에서 영감을 얻어 극화한 것입니다. 소설책에서, 연극으로, 영화로 미디어를 바꿔가며 대중에게 찾아올 수 있는 것은 그만큼 매력적인 내용이 있어서라 생각합니다. 소설에서는 프로이트를 찾아간 이를 C.S. 루이스라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C.S. 루이스, 그는 어떻게 보면 프로이트와 정반대에 서 있는 인물입니다. 일단 다 죽어가는 프로이트와는 다르게 C.S. 루이스는 이제 갓 마흔을 넘긴 젊은 교수였습니다. 그리고 프로이트는 이공계 남자였고, C.S. 루이스는 문과 남자입니다. 프로이트는 무신론자, C.S. 루이스는 유신론자. 프로이트는 <정신분석 이론>을 창설하고 사람을 분석 했고, C.S. 루이스는 <순전한 기독교>라는 저서를 통해 변증법으로 신을 증명해 낸 인물입니다. 달라도 너무 다른 두 남자가 서로 다른 상황에서 만나는 건 꽤나 흥미진진한 설정이 될 것 같습니다.
 

영화라서 볼 수 있었던 장면들

사실 영화 <프로이트의 라스트 세션>의 시작은 그렇게 유쾌하지 않았습니다. 영화에 투자한 투자사, 배급사, 영화사들의 자기소개가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줄줄이 나왔기 때문입니다. 영화 시작 직전의 회사로고 소개의 특징이 ‘곧 영화가 시작 될 거야!’ 하는 기대감을 갖게 하는 음악과 영화 시작의 연결점을 위한 정적이 깔리게 되는데, 그게 대여섯 번을 반복하다 보니 조금 피곤해졌다고 할까요. 강제로 줬다 빼다를 여러 번 당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분명 이건 영화에서만 볼 수 있는 장면 일 것입니다.
영화에는 프로이트와 루이스가 각자 생각에 빠질 때 회상 장면이 훌륭한 미장센으로 표현됩니다. 편집점이 살짝 길다고 생각 될 때도 있었지만 그건 빨리빨리에 절여진 대한민국 사람이라서 그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이런 장면들은 오직 영화에서만 볼 수 있는 장면들입니다. 즉 영화감독이 표현하고 싶은 심리의 깊은 부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장면이 확정적이거나 결과가 있게 표현되지 않습니다. 그 모든 창면이 ‘추측’의 가능성을 과도하게 열어 놓습니다. 그 아마도 두 캐릭터에 대한 여러 소문들을 그런 식으로 흘려 놓은 것 같습니다. 가령 과거 루이스가 1차 세계대전에 참여했고, 동료가 죽자 동료의 어머니를 자신이 돌보겠다고 했을 때, 동료의 어머니는 그런 게 필요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어린 루이스는 친구의 어머니에게 ‘우정’을 나누는 사이가 되면 되지 않느냐고 말합니다. 이 부분은 C.S. 루이스가 실제로 상당한 나이차이가 나는 여성과 교재 했던 것을 흘려주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프로이트가 자신의 딸 안나를 바라보는 시선도 살짝 혼란스럽습니다. 마치 딸에게 부도덕한 마음을 품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그것 또한 사실입니다. 프로이트는 히스테리를 연구하면서 자신이 상상했던 것보다 많은 근친강간 혹은 근친상간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이 연구기간에 프로이트는 자신의 딸에 대한 근친상간 욕망이 있음을 깨달았다는 편지를 남겼다고 전해집니다. 즉 영화에서 시각화 된 몽환적이고 답이 없는 장면들 모두가 사실 현대인의 시선으로 두 인물에 씌워졌던 의혹들을 시각화한 것이라고 이해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라스트 세션은?

영화의 제목인 <프로이트의 라스트 세션>. 여기서 세션은 여러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심리학에서는 상담이 진행되는 시간을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프로이트의 마지막 상담을 표현한 제목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피상담자가 C.S. 루이스가 됩니다. 하지만 영화의 초반부에 프로이트는 C.S. 루이스가 피상담자의 카우치에 앉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말을 합니다. 즉 그는 C.S. 루이스를 상담하려고 부른 게 아니란 뜻이 됩니다. 영화에서도 프로이트는 자신과 다른 논쟁을 즐긴다는 말을 하며, 신에 대한 각자의 생각을 이야기하는 시간을 갖습니다. 하지만 대화가 길어지고, 서로의 심리 저변을 스치는 대화가 오가면서 프로이트의 카우치에 C.S. 루이스가 앉게 됩니다. 그리고 영화의 종반부에 가면 프로이트가 카우치에 앉고, C.S. 루이스가 그를 상담하듯 그의 반대편에 앉는 장면이 나옵니다. 유신론과 무신론, 결국 한 인간의 결심일 뿐입니다. 다만 그것이 너무나도 영향력이 큰 저명한 학자들이라는 게 특이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영화는 중반부를 달리며 프로이트의 목숨이 다 해감을 보여줍니다. 그렇게 본다면 여기서 말하는 세션은 프로이트 인생의 끝 부분이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고민합니다. 목숨의 길이를 신에게 맡기지 않겠다. 죽음도 좋은 날 내가 설정 하겠다. 그래서 그는 굴복할 수밖에 없는 심리적, 육체적 고통이 올 때, 빨간 약을 꺼내 봅니다. 마치 자신을 그런 고통의 구렁텅이로 내버려 두고 관망하고 있는 신에게 저항이라도 하듯 말입니다.
 
 

결론이 뭐냐?

영화에는 예고편에 나오는 신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끝장 논쟁이라 할만한 게 크게 없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결론이라 칭할 것도 없습니다. 사실 없는 게 정상입니다. 두 학자는 학자가 연구해온 평생을 꺾기 위해 만난 게 아닙니다. 그저 서로의 연견에 서로를 노출시키기 위해 만난 것입니다. 서로의 생각을 듣고, 반증을 생각하고 학자로서 단단해지는 시간을 갖는 것입니다. 물론 술을 조금 마시면서 대화하지만 우리가 말하는 술 취한 아저씨들의 꼬장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고편에 낚이시면 영화가 종반부로 다가갈수록 초조함을 느끼실 것입니다. 그래서? 무신론자가 왜 유신론자가 됐는데? 왜 종교에 대해서 지식이 풍부한 영감탱이는 끝까지 무신론자인 건데?? 학자의 대화에 결론이 없는 건 당연한데, 이건 영화잖아? 영화는 결론이 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라고 생각하실 분도 계실지 모르지만 이 영화 자체는 역사극이 아니라 현실의 인물을 소재 삼아서 상상으로 꾸며낸 허구입니다. 자칫 실존 인물이 실제로 이런 대화를 나누고, 각자의 신념을 밝혔다 라는 게 잘못 전해지면 영화가 역사 왜곡이 되니, 영화에는 학자들이 실제로 주장하지 않은 내용을 넣지 않았습니다. 그저 후대의 우리가 유추하고 추론하는 것들을 간접적으로 흘리는 것뿐입니다. 이런 화법에 익숙하지 않으시면 영화를 보고 나오신 후 별점 테러를 하실 지도 모릅니다. 부산에서 본 영화는 2주를 넘기지 못하고 모두 영화관을 내려옵니다. 그리고 개봉관의 수도 극도로 적습니다. 우리나라 사람이 종교에 관심이 많으면서 남한테 종교 이야기 듣는 거 싫어하고, 결론 없는 이야기 하는 거 싫어해서 그런 것일까요?
 
 
안소니 홉킨스 그는 정말 GOAT
지그문트 프로이트로 분한 배우는 명배우 안소니 홉킨스였습니다.. 실제로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구강암으로 많은 수술을 받았기에 영화 <프로이트의 라스트 세션>에는 입에서 피를 흘리거나 보철을 입에서 빼내거나 수건으로 입을 막고 있는 장면이 다수 등장합니다. 양들의 침묵에서도 입을 막고 계시더니, 여전하시군요. 안소니 홉킨스가 맡은 프로이트는 괴짜 같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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